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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바다를 처음 마주한 인류는 호모 에렉투스였을 것이다. 여기서 ‘마주했다’는 것은 막연히 바라보는 대상이 아닌, 삶의 일부로서 온몸으로 부딪혔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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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인간의 초기 조상은 주로 숲과 초원을 오가며 삶을 영위했다. 처음 그들에게 아프리카 대륙은 요람과 같은 곳이었지만, 빙하기와 같은 대규모 환경 변화가 요람을 척박한 땅으로 바꾸어놓았을 것이다. 빙하기는 반복되었고, 그때마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땅을 찾아 길을 나서야만 했다. 이것이 인류의 조상들이 몇 차례 아프리카 탈출을 시도한 배경이다. 그들이 미지의 세계를 더듬어가며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났을 때마다 마주친 것은 다름 아닌 바다였다. 인류사에서 처음 나타난 어부들은 해안가에 두터운 조개무지貝塚를 남긴 신석기인들이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 구석기 시대부터 인간은 바다를 이용했다.

인간과 바다의 관계는 다른 주제들에 비해 유독 모호한 편이다. 아마도 증거가 남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를 전문적으로 이용했던 신석기인들에게는 배가 있었다. 우리나라 창녕 비봉리飛鳳里 패총에서는 약 8000년 전에 만든 길이 4미터의 통나무배가 나와서 그들이 항해사였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편 ‘외이도 골종external auditary exostoses’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신석기인의 바다생활을 증명했다. 이것은 오랜 잠수 생활의 결과로 귀 뼈의 일부가 기형적으로 자라는 질병이다. 우리나라 남해안의 신석기 시대 유적인 여수 안도安島 패총에서 발굴된 신석기인의 머리뼈에서도 외이도 골종이 관찰되었다. 반면 구석기 시대의 바다에 관해서는 이를 밝힐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마치 퀴즈처럼 단편적인 증거만 발견될 뿐이다. 이번 이야기는 단편적인 증거들을 모아서 바다와 마주한 첫 인간들의 이야기를 추리해보려 한다.

그림1. 아프리카와 유럽 대륙이 마주보는 지브롤터 해협.jpg

[그림 1. 아프리카와 유럽 대륙이 마주보는 지브롤터 해협]

바다를 처음 마주한 인류는 호모 에렉투스였을 것이다. 여기서 ‘마주했다’는 것은 막연히 바라보는 대상이 아닌, 삶의 일부로서 온몸으로 부딪혔다는 의미다. 호모 에렉투스는 마침내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과 아시아까지 진출했다(약 100만 년 전 인류 최초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 새로운 삶터를 확보하기 위해 북쪽으로 가던 그들은 아프리카 대륙의 북단에서 지중해를 마주했다. 건너편으로 갈 방법은 아라비아 반도로 우회하거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는 길뿐이다. 동물들의 이동을 따라가면 자연스레 우회로를 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 유럽 대륙이 호모 에렉투스의 호기심을 가만두지 않았다. 하지만 지브롤터는 최대 수심 900미터에 달하는 해저협곡으로, 가장 혹심한 빙하기에도 육지가 된 적이 없다.

그들은 이 바다를 건넜을까? 단편적인 고고학 증거를 하나하나 모아서 그들이 바다를 건넜는지 아닌지를 추측해야 한다. 이 해협보다는 얕지만, 역시 빙하기에 유럽 대륙과 연결된 적 없는 지중해의 몇몇 섬에 호모 에렉투스의 도구인 주먹도끼가 남아 있다. 이탈리아 서쪽에 위치한 샤르데냐섬에서 3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클락토니안Clactonian 문화기의 석기들이 발견되었다. 그리스의 크레타섬 남부 플라키아 유적에서도 최소 13만 년 전으로 연대 측정된 아슐리안Acheulean 문화기의 주먹도끼를 비롯한 대형 석기들이 발견되었다. 이 정도의 자료라면 그들이 바다를 건너간 것은 확실해 보인다. 한편 아라비아 반도를 경유해 유럽에 도착한 호모 에렉투스들의 일족인 하이델베르그인, 혹은 그들의 후손인 네안데르탈인이 유럽 해안에서 그곳으로 건너갔을 수도 있다. 13만 년 전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직 유럽에 도착하기 전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호모 에렉투스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30만 년을 상회하는 주먹도끼를 포함해 다양한 석기들이 발굴되었으므로 그들이 한반도에 왔다고 추정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그림2. 크레타섬의 주먹도끼.jpg

[그림2. 크레타섬의 주먹도끼]

지금으로부터 수십만 년 전에 항해가 시작되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증거가 동남아시아 해역서도 발견됐다. ‘왈레이시아Wallacea’는 이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받는 곳이다. 왈레이시아는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을 시작으로 티모르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에 이르는 해역 일대를 지칭한다. 여기엔 크고 작은 섬들이 마치 징검다리처럼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수심이 매우 깊다. 빙하기에 대륙붕이 드러나면서 말레이반도와 보르네오섬, 수마트라섬, 자바섬 등이 ‘순다랜드Sundaland’로 이어졌을 때도 이곳은 섬으로 남아 있었다. 왈레이시아의 섬들 사이는 바다가 매우 깊어서 배 없이 이동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왈레이시아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생물지리학적 경계선들도 그 사실을 대변한다. 동쪽으로부터 차례로 월리스선Wallace Line, 웨버선Weber Line, 리데커선Lydekker Line이 설정되어 있는데, 깊은 해협이 각 지역을 격리시킨 결과 섬마다 각기 다른 고유 생물종이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윈의 섬으로 유명한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대부분의 생물종들이 홀로 진화를 거치면서 고유종이 된 것과 같은 이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왈레이시아의 모든 섬에 인간의 생활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인간보다 수영에 능한 동물들도 건너지 못한 바다를, 인간은 무사히 건너가서 그곳에서 오랜 시간 번성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