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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세상에 도착한 문장이 제대로 완성되는 순간은 ‘작가가 문장을 끝내는 순간’이 아니라 ‘독자가 문장을 이해한 순간’이다. 문장은 작가에게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그 문장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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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하기도 하지.” 아주머니가 속삭인다. “네가 내 딸이라면 절대 모르는 사람 집에 맡기지 않을 텐데.” ―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중에서

나한테 애가 없다고 해서 다른 집 애들 머리에 비가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지. ―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중에서

‘문해력(文解力)’의 ‘문(文)’은 글이나 문장을 뜻하지만, 우리는 때로는 단어나 문장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침묵이나 행간의 여백까지 읽어내야 한다. 그리하여 침묵의 빈칸을 통해 ‘그 상황에서 미처 할 수 없는 말들’을 그리는 연습을 한다. 어떤 침묵은 절묘하고 아름답다. 침묵이 있기에 그 문장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그런데 어떤 침묵은 미친 듯이 서럽고 아프다. 그 사람에게 듣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정작 그 사람은 묵묵부답일 때. 우리는 그 침묵이 이별의 통보라는 것을 이해한다. 공적인 글들 속에도 수많은 침묵과 여백이 서려 있다. 구구절절 상황을 다 설명할 수 없기에 생략하는 문장도 많고, 완전히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냉철한 단어들만 쓸 때도 많다.

신문 기사, 성적표, 알림장, 부고 등 수많은 글들에는 ‘미처 말하지 못한 수많은 진실들’이 숨어 있다. 진실에 무지해서가 아니라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 때문에 사람들은 침묵하고, 생략하고, 에둘러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이토록 수많은 침묵을 읽어내는 문해력이 필요하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문해력 수업이 필요하다. 배려 없고 존중 없고 예의 없는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 우리에게는서로를 위해, 세상을 더욱 살 만하게 만들기 위해, 더 이상 말 때문에 상처받고 말 때문에 희망을 포기하는 일이 없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상 속의 문해력 공부가 절실히 필요하다.

한자어나 어려운 단어들을 젊은 세대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기성세대들은 당황하면서 “어떻게 이런 단어도 모를 수 있나” 하고 한탄한다. A가 “우리 집은 종갓집이야”라고 했더니 B가 “우리 집은 아파트야”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일상 속에서도 상대방의 의중을 오해하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해졌는지를 보여준다. “종갓집이 뭐지?”라고 물어보기라도 했다면 이런 기막힌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문해력의 발전은 시작된다. 모르면서도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제멋대로 해석해버릴 때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질 수 있다. ‘무운을 빕니다’에서 ‘무운(武運)’을 ‘무운(無運)’으로 오해하는 차원의 독해력은 ‘모르는 단어’를 배우는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최소한의 노력조차 포기해버릴 때, 공동체의 의사소통은 위기에 빠진다. 국민이 무지해질수록 권력자들은 손쉽게 통제력을 발휘하여 국가를 ‘힘 있는 사람들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아무리 편파적인 뉴스라도, 아무리 권력에 찌든 언론이 만들어낸 왜곡된 기사라도, ‘우리가 제대로 읽어내고 해석하는 능력’만 있다면 기자의 심리는 물론 언론의 부패 정도까지 제대로 가늠해낼 수 있다. 세상에 도착한 문장이 제대로 완성되는 순간은 ‘작가가 문장을 끝내는 순간’이 아니라 ‘독자가 문장을 이해한 순간’이다. 문장은 작가에게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그 문장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