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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 비둘기 : 비둘기는 하늘의 쥐

<aside> 💡 1965년 1월, 서울 남산공원에 있던 비둘기장을 철거했고 스물여덟 마리의 비둘기가 죽었다. 이에 시민들은 슬퍼하며 성금을 모아 합동 장례식을 치르고 ‘비둘기 묘비’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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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중학생 때 나온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1집 앨범 제목이다. 당시 메탈 소년이었던 나에게는 너무 진보적이고 말랑했다. 비둘기에게 하늘의 쥐라고 한 것도 영 별로였다. 세월이 흐르고 다시 들어보니 음악은 참 좋은데 왜 저런 제목을 지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마도 저 음악인에게는 두 종의 어떤 공통점이 크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비둘기를 하늘의 쥐라고 하는 것은 비둘기와 쥐를 한꺼번에 멸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시에서 사람이 남긴 찌꺼기를 먹고사는 것이 두 존재를 묶어버릴 정도로 중요한 공통점인가?

인간은 동물 중에서 가장 과하게 먹이를 만들어낸다. 창고에 쟁여둔 식량은 기업의 이윤을 최대화하기 위해 수시로 폐기하고,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물은 다른 동물의 중요한 식량이 되다 못해 처리 가능한 용량이 포화되어 쩔쩔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이 ‘쓰레기’라고 부르며 역할을 부여하지 않은 이토록 풍만한 유기물에, 스스로 옮겨 다니는 비인간동물이 모이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사람을 따라 이동한 쥐와 비둘기도, 누군가에게 종속되지 않은 고양이와 개도, 야생에 살 것 같지만 인간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음식물 찌꺼기의 유용함을 학습한 멧돼지와 너구리도 도시가 배출하는 막대한 양의 영양 물질에 의존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멧돼지를 ‘덩치 큰 너구리’라 부르지 않는다.

인간과 가까운 동물의 이름은 쉽게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전직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은 쥐로 불렸고, 또 다른 한 사람은 닭으로 불렸다. 도시의 비둘기가 살이 쪄서 잘 날지 못하는 모습을 두고 닭과 비둘기를 합친 ‘닭둘기’라는 말로 부르곤 한다. 이는 도심의 환경이 비둘기에게 자주 날아올라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보다 지상에서 위험 요소만 살짝 피하는 것이 더 효율적임을 깨닫게 했기 때문인데, 굳이 게으름이나 비만 같은 인간의 사회적 개념을 갖다 붙이곤 한다. 게다가 A4 용지 한 장 크기도 안 되는 철제 케이지 안에서 날개도 못 펴는 형편에 점점 나는 능력을 잃어가는 닭을 비둘기를 멸시하는 용도로 이용한 것이다.

쥐도, 비둘기도, 닭도 인간이 그들을 무어라 부르건 신경 쓰지 않지만, 인간이 멋대로 부여한 동물의 이미지는 동물의 존재를 왜곡한다. 그리고 이러한 왜곡은 인간과 동물이 관계를 형성할 때 편견을 강화하는 힘을 갖는다. 비둘기를 하늘의 쥐라고 부를 때, 그들 각자의 고유성은 지워진다. 쥐는 쥐고 비둘기는 비둘기다. 무역선에 곁달려 한반도에 도달한 뒤 개체 수가 많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동물이 된 그들에게 가져야 할 감정은 미움이 아니라 조금 미안한 마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이 많은 비둘기는 다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가 도시에서 만나는 비둘기는 대부분 집비둘기(Columba livia domestica)이다. 이들은 바위비둘기(Columba livia)를 가축화한 품종이기 때문에 외모는 바위비둘기와 흡사하나, 가축화 과정에서 다양한 종이 섞이면서 다채로운 형질을 갖게 되었다. 이름이 ‘집’비둘기인 이유도, 영어 이름이 ‘domestic pigeon’인 이유도 가축화된 품종이기 때문이다. 집비둘기의 가축화는 5000년에서 1만 년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 닭보다도 훨씬 먼저 최초로 가축화가 시작된 조류다. 인간과 가장 친한 새인 셈이다. 다른 가축 종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 어떻게 인간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역시나 다른 가축들처럼 귀여워도 하고 잡아먹기도 하고 의례에 사용하기도 하며 오랜 시간을 지내왔다. 아직 식용으로 사용하는 지역이 있긴 하지만, 인간에게 비둘기의 마지막 효용은 통신수단인 전서구傳書鳩와 올림픽 등의 큰 행사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날리는 것이었다.

개나 고양이처럼 비둘기도 인간과 함께 전 세계로 퍼졌다. 사람을 따라 이주한 동물들은 대개 원서식지가 어디인지, 어떤 경로를 타고 옮겨 갔는지 추적이 가능한데, 집비둘기는 인간과 함께 세계로 퍼져 나간 역사가 길고, 날아다니는 동물이라는 특성 때문에 그 조상이 어디에 분포했는지도 정확히 알기 어렵다. 한반도에 집비둘기가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알려진 바 없다. 원래 한반도에는 집비둘기와 진화적으로 가까워 비슷하게 생긴 양비둘기(Columba rupestris)라는 고유종이 전국에 분포했다. 그러다 어느 새인가 양비둘기는 멸종 위기에 처하고 집비둘기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인간이 한반도에 집비둘기를 본격적으로 푼 것은 2차 대전 이후로 보인다. 그전에도 군대가 통신용으로 집비둘기를 들여왔지만 함부로 날릴 수 없는 값비싼 도구였다면, 1950년대부터는 대통령 취임식이나 전국체육대회, 올림픽 같은 전체주의적 행사에서 집비둘기를 수백, 수천 마리씩 날려대곤 했다.

1960년대만 해도 비둘기는 ‘소중한 평화의 상징’으로 애착의 대상이었다. 서울시청 옥상이나 남산공원에는 서울시가 관리하는 비둘기집이 있었다. 서울시장이 밥을 주기도 하는 공식적인 사육 장소였다. 1965년 1월, 서울 남산공원에 있던 비둘기장을 철거했고 스물여덟 마리의 비둘기가 죽었다. 이에 시민들은 슬퍼하며 성금을 모아 합동 장례식을 치르고 ‘비둘기 묘비’도 세웠다. 어린이들은 “동무 잃은 남산 비둘기에게 모이를 사서 뿌려주셔요”라며 신문사에 성금을 보내고 ‘너무나 너무나’ 슬퍼했다. 시청 앞에서 비둘기가 차에 치어 죽어서 참혹하다는 기사도 있다. 흑백사진 속에는 집비둘기로 보이는 비둘기들이 “기르는”, “순한”, “지능이 높고”, “잘 훈련된” 비둘기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