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여러 가지 사회적 업무를 봐야 할 때는 몸이 긴장되고 에너지가 항상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글을 쓸 때는 사회생활의 가면을 벗고 온전한 나와 만날 수 있기에 몸과 마음이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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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세상 바깥으로 숨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 세상을 사랑했지만, 이 세상이 날 받아주지 않는다는 느낌에 시달렸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파트타임이었다. 평생 모범생으로 살았지만 취직은 되지 않았고, 오랫동안 쌓아온 인간관계도 무너져버렸고, 그 어떤 조직에도 속할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방황했다. 기쁨보다는 슬픔에 예민한 내 성격이 싫어졌다. 세상살이의 슬픔과 고통에, 이제는 둔감해지고 싶었다. 인생의 길을 잘못 선택한 건가, 세상엔 날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건가, 그런 질문으로 자신을 고문하고 있었던 그때. 나를 붙잡아준 유일한 기둥은 글쓰기였다. 사회생활을 할 때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곤 했는데, 글을 쓸 때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원고 청탁서가 올 때마다 ‘반드시 잘 해내고 싶다’는 느낌에 가슴이 뛰었다. 그런 설렘과 긴장감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 시기의 방황과 우울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글쓰기는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들이 ‘숨기 좋은 방’이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할 때는 잠시 ‘쾌활한 가면’을 쓸 수는 있었지만, 집에 돌아오면 나만의 글쓰기라는 소박하지만 한없이 아늑한 텐트 속으로 숨고 싶었다. 남들은 ‘웃을 일이 없어도 자꾸 웃으면 정말 좋은 일이 생긴다’고들 하지만, 나는 웃고 싶지 않을 때 억지로 웃으면 병이 나는 사람이었다. 여러 가지 사회적 업무를 봐야 할 때는 몸이 긴장되고 에너지가 항상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글을 쓸 때는 사회생활의 가면을 벗고 온전한 나와 만날 수 있기에 몸과 마음이 해방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초창기였다. 그때는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밤을 새는 것이 다반사였지만, 지하 PC방의 매캐한 공기 속에서 모두가 게임을 하고 있는데 나 혼자 한글프로그램을 켜놓고 사약처럼 독한 커피를 연신 들이켜며 글을 쓰는 그 모든 나날들이 마냥 좋았다. 몸에 좋다는 음식을 먹어야만 몸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때의 나는 인스턴트커피와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몸과 마음이 튼튼해지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일을 찾았으니까. 젊음 덕분만은 아니었다. 열정의 승리였다. 열정을 불태우는 순간에는 다른 무엇도 중요치 않다. 열정은 나이와 계급을 잊게 하는 마력이다.
글쓰기에는 또 다른 마력이 있다. ‘짐작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통해서 인생의 신비를 하나하나 풀어헤쳐 보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글쓰기의 세렌디피티’라고 부른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뜻밖의 발견, 우연에서 얻는 기쁨인데, 글쟁이에게는 이런 일이 매일 일어난다. 글쓰기는 좀처럼 계획대로 되지 않는데, 오히려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더욱 멋진 일들이 일어난다. 예컨대 나는 글쓰기라는 아지트에 숨어서 내 모든 인간관계를 최소한으로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인간관계에 소질이 없으므로 글쓰기라는 가림막 뒤로 숨어서 아주 조용히, 극도로 조용히 삶을 꾸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글을 쓰면 쓸수록 만나야 하는 사람, 알고 지내는 사람이 늘어갔다. 편집자와 기자는 물론 수많은 독자들과 만나는 그 다채로운 시간이 좋아졌다. ‘나는 인간관계를 맺는 데 재능이 없다’는 편견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좋은 인간관계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심을 다해 사람을 대하는 모든 순간, 누구에게나 피어날 수 있는 마음의 열매였다.
특히 편집자와의 관계는 내가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인생의 세렌디피티였다. 글을 쓰기 전에는 ‘편집자’라는 직업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작가에게 마감을 독촉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편집자에게 가진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였다. 그런데 마감 독촉은 편집자의 수많은 일들 중에서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좋은 편집자는 책을 만들어가는 전체 과정을 지휘할 줄 안다. 좋은 편집자는 책 만들기를 무조건 ‘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작품과 수많은 인생들을 이어주는 눈부신 코디네이터가 되기도 한다. 유능한 편집자는 작가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나 영감을 주기도 하고, 너무 지쳐 글쓰기의 동력을 잃었을 때에는 작가에게 자신의 ‘첫 마음’을 되새겨 보도록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도 ‘작가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를 알려주는 사람, 작가가 원고의 완성을 위해 무작정 달리느라 놓치기 쉬운 자신의 좌표를 알려주는 사람이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런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때로는 글과 책에 대한 의견이 달라 편집자와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그런 갈등은 더 나은 책을 만들기 위한 과정의 일부였다.
때로는 너무 글쓰기에만 집착하여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에 처하는 작가의 삶에서 ‘새로운 글쓰기’를 향한 방향타를 제시해주는, 눈부신 구원투수가 되어준 편집자도 있었다. 때로는 ‘나는 별로 좋은 작가가 아닐지도 몰라’라는 자기혐오에 빠져 있을 때도, 내 원기를 북돋아준 사람들은 편집자였다. 아주 오래전, ‘이제 문학평론은 그만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을 때, 당시 문학동네출판사의 조연주 편집자님이 K 평론가님과 나를 초대하여 정말 맛있는 밥을 사주었다. 그때는 낮은 자존감의 늪에서 헤매고 있을 때였기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렇게 무작정 밥을 사주는 그의 따스한 마음이 눈물겨웠다. K 평론가님은 당시 일본 유학을 앞두고 있었기에 초대의 이유가 있었지만, 나는 왜 그 자리에 초대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저를 왜 초대하셨나요’라고 물을 용기도 내게는 없었다. 그때 나는 무슨 대단한 책을 계약한 것도 아니었고, 유명한 평론가도 아니었다. 아마도 그저 순수하고 해맑은 ‘응원’이 아니었을까. 열심히 쓰라고. 포기하지 말고, 주눅 들지 말고, 용감하게 나아가라고. 나는 그날 그 맛있는 저녁의 의미를 그렇게 받아들인다. 조연주 편집자님은 나에게 그토록 따스한 사람이었다. 그토록 따스한 타인의 환대는 평생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