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우리는 집 주변에 쥐가 몇 마리나 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내 곡식을 얼마나 갉아먹는지 계산해볼 새도 없이 머리털을 쭈뼛 세우며 세스코에 전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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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를 자세히 볼 일은 잘 없다. 대개 그러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비교적 최근에 본 쥐도 이렇게 ‘쥐 끈끈이’에 붙어 이미 죽어가는 처지였다. 숨이 사그라지고 있었는지, 이미 끊어졌는지 자세히 보지도 않았다. 일하던 동물원 한구석에 설치한 그 끈끈한 물질에 잡혀 죽어가던 참새 때문에 그 옆에 붙은 쥐도 그저 스쳐보게 되었을 뿐이다. 살아 있는 참새는 날개와 배가 끈끈이에 엉겨서 고개만 간신히 들고 있었다. 식용유로 간신히 떼어서 살려보려고 했지만 결국 다음 날 죽었다. 끈끈이에 붙은 작은 동물의 예후는 대개 좋지 않다. 파리를 잡겠다고 끈끈이를 여러 개 펼쳐놓은 동물원 사육사에게 당장 그것을 걷어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참새 한 마리가 또 끈끈이에 붙어 죽었다. 그 옆의 쥐는 어떤 모습으로 죽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동물원에는 쥐가 많다. 어느 동물원이나 그렇다. 관람객의 눈에는 안내판에 적히지 않은 쥐가 거기 있는 것이 혐오스러울 수 있지만, 동물원 동물들은 공식적 전시 동물이 아닌 쥐와 친숙하게 지낸다. 어차피 사람이 준비한 먹이는 풍부하기 때문에 쥐와 먹이를 두고 다툴 일은 없다. 한국 대부분의 동물원에서 전시하지만 인기는 없는 마라(*Dolichotis patagonum)*가 밥을 먹을 때면 시간 맞춰 나타나던 쥐가 몇 마리 있었다. 실험용으로 흔히 쓰이는 흰쥐(Rattus norvegicus)였다. 마라와 흰쥐는 같은 쥐목(Order Rodentia)이니 대충 식단도 맞았을 것이다. 설치류를 뜻하는 ‘Rodents’는 ‘잘근잘근 씹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rodere’에서 왔다. 흰쥐와 마라 두 종의 쥐가 낡고 인위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나무 데크에 모여 한국의 마트에서 파는 당근과 양배추, 식빵을 씹는 모습은 마치 B급 외계영화의 한 장면 같다. 그 흰쥐들은 산 채로 스라소니의 먹이가 되기 위해 동물원에 들어왔다가, 대대로 철창에 갇혀 사는 바람에 사냥에 소질이 없어진 스라소니가 데면데면하게 석방한 개체들이다.
쥐들과 적당히 어울려 사는 동물원 동물들과 달리, 우리 인간은 쥐가 나타나면 대개 기겁한다. 마치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양 혐오와 공포를 느낀다. 순간적으로 어떻게든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들고 만다. 어떤 종을 시급히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동안 우리는 그 동물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죽임을 당하는 동물이 하는 경험과 동물이 죽는다는 결과를 분리하지 않았다. 21세기가 되어서야 가축의 도살이나 실험동물의 인도적 죽임을 법제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죽일 필요가 있을 때는 죽이되 그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는 동물의 고통과 죽이는 사람이 느끼는 충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동물 윤리로 자리 잡고 있다. 죽임당하는 동물의 복지까지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쥐약은 대개 항혈액응고제로 만든다. 온몸에 출혈을 일으켜 과다 출혈로 죽이는 원리다. ‘죽인다’는 사실을 맨 뒤에 놓고, 쥐약을 먹은 쥐가 죽기 직전까지 하는 경험을 살펴보면 쥐약은 쥐를 죽이는 방법 중에서도 매우 큰 고통을 주는 방법이다. 현대 동물복지의 관점에서 보자면 잔인하다. 쥐를 먹이원으로 하는 수많은 야생동물과 개나 고양이 같은 가축종이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고 연달아 죽기도 한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래서 동물과 생태를 생각하는 나라들은 쥐약과 관련한 면허 제도를 시행해 제한적으로만 이용한다. 반면에 한국에는 쥐약을 제한하는 제도가 없다. 아직 동물복지도 생태도 뒷전인 나라다. 쥐약을 아무나 팔고 아무나 쓰기 때문에 취약해진 생태계라는 초가집을 일상적으로 태우고 있다.
쥐약의 무분별한 사용 때문에 덩달아 절멸의 위기를 맞은 동물이 있다. 바로 붉은여우다. 붉은여우는 남한에서 사실상 멸종한 것으로 보고 정부가 복원을 진행하고 있다. 중국 등지에서 남한에 살던 것과 같은 아종(subspecies)을 들여와 번식시킨 다음 살 만한 곳에 풀어놓는 작업이다. 붉은여우는 기후가 다양한 북반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서식한다. 세계지도에 색칠한 붉은여우의 분포도를 보면, 유라시아 대륙에서 남한만 다른 색이다. 혹독한 환경에서도 웬만하면 생존하는 붉은여우의 놀라운 진화적 적응력을 오로지 한국만이 무력화한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파괴력이 바로 1970년부터 군사독재정권이 대대적으로 벌인 ‘전국 쥐잡기 운동’의 본질이었다. 쥐를 주식으로 하는 붉은여우들이 당시 쥐약 먹고 죽은 쥐를 잡아먹고 모조리 죽어버렸다.
우리가 포유류라고 부르는 4,629종 가운데 절반 가까운 2,277종이 쥐목이다. 붉은여우를 비롯해 맹금과 파충류를 포함하는 중소형 육식동물이 쥐를 주식으로 하게 된 것은 쥐의 대단한 번식력 때문이었다. 이들 동물에게 쥐는 먹어도 먹어도 새로 생겨나는 밥과 마찬가지였다. 독재정권은 그런 쥐를 절멸시키겠다는, 생태적으로 무모한 시도를 했다. 1970년대에는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70~80년대 정부가 배급한 쥐약에는 ‘인체나 가축에 무해하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지만 명백하게 유해했다. 쥐는 못 잡고 사람만 잡는다는 볼멘소리도 나왔다. 여러 종의 포식동물이 멸종한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생태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쥐잡기 운동은 독재자가 죽으면서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