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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현대의 제작자들 역시 재료 구하는 일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귀한 자원을 얻는 일은 변함없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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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료에 대한 지난 글은 인간이 색을 처음 소유하고 사용을 시작했던 무렵의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대부분의 유용한 것들은 시간이 감에 따라 의존도가 커지고 존재감이 확대되기 마련이다. 안료 역시 점차 색채가 다양해지고 사용 범위도 확대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 의식의 중요한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제부터 희소한 고고학 자료들을 통해 그 과정을 조심스럽게 되짚어 가보자.

초기의 안료는 모두 자연 상태의 물질에서 기원한, 말 그대로 ‘천연 안료’들이다. 자연에서 채취한 것이라서 질적으로 낮다거나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발색과 안정성 측면에서는 오히려 인공 안료보다 탁월하다. 천연 안료가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사용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국화를 그리거나 전통 건축의 화려한 단청을 입히는 데에 반드시 사용되는 석채石彩, 혹은 암채岩彩가 대표적이다. 천연 안료의 단점이 하나 있다면 전편에서 잠깐 언급했듯 대량 생산이 어렵다는 것이다. 생산에 많은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고, 그 희소성 때문에 현대에도 여전히 고급 안료로서 대우받고 있다. 이것을 대체하기 위해 화학 기술을 이용한 합성 안료들을 개발해왔지만 천연 안료의 발색과 안정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구석기 시대의 ‘원시인’들이 만들기 시작한 천연 안료가 지금까지도 대단한 존재감을 뽐낸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안료의 원재료들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인간이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많이 사용한 안료는 빨간색이다. 자연 상태에서 빨간색은 적철석hematite을 많이 함유한 토양이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산화되면서 만들어진다. 우리 주변에서 관찰되는 황토는 대부분 이런 성인成因을 갖고 있다. 한때 짙은 빨간색을 만들기 위해 흙을 가열했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하지만 가열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분석 기술이 개발된 이후 구석기 시대에는 안료를 가열 처리한 사례가 없음을 확인했다. 빨간색과 비슷한 계열인 노란색, 갈색 등은 적철석의 함유량 차이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노란색과 갈색은 빨간색에 비해 매우 희귀한 편이다. 빨간색 못지않게 많이 사용한 색은 검은색이다. 주변에 흔하고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숯이 검은색의 주재료이다. 희귀한 재료지만 망간 산화물 역시 검은색이 된다. 검은색 안료의 재료가 숯인 경우에는 탄소연대측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또 다른 면에서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의 가치를 지닌다. 한편 가장 흔할 것만 같은 흰색은 오히려 희귀하다. 흰색 안료는 주로 방해석이나 활석·석고·석영 같은 암석에서 채취할 수 있다.

[그림1. 안료 가루(왼쪽에서부터 황토, 숯, 망간, 방해석, 석고의 가루)]

[그림1. 안료 가루(왼쪽에서부터 황토, 숯, 망간, 방해석, 석고의 가루)]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들이지만 그것을 채취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황토는 다른 재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부할 것 같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결코 흔하게 발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황토 중에서도 산화철이 특히 많이 함유되어 있는 특정 지점을 찾아내야 했다. 안료에도 일종의 광산이 존재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연으로부터 구해야 했다. 동물이 많아서 사냥하기 좋은 곳, 석기의 재료가 되는 좋은 돌이 풍부한 곳, 계절 따라 갖가지 열매를 채취할 수 있는 곳 등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그 데이터베이스 안에 안료 채취 광산들도 들어 있었을 것이다. 유적에서 발견되는 안료의 원산지 연구 결과들을 참조하면 유적으로부터 최대 수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기도 했다. 현대의 제작자들 역시 재료 구하는 일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귀한 자원을 얻는 일은 변함없이 어렵다.

자연에서 재료를 구했다면 이제부터는 사용할 수 있는 안료로 가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흙에서 채취한 경우라면 고운 입자를 정제해야 한다. 돌을 채취했다면 곱게 빻아 불순물을 제거하고, 역시 정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앞서 소개했던 블롬보스 동굴과 카푸제 동굴에서 발견된 10만 년 전 안료는 이 과정을 거친 것들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보다 훨씬 오래전, 즉 10만 년 이전부터 자연 상태에 가까운 안료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료 사용의 범위가 넓어지면 그에 맞춰 가공 방법도 다양해져야 한다. 만일 아무런 가공 없이 사용한다면 색상도 균질치 않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결과물의 장기 보존이 어렵다는 것이다. 학생 시절 흔하게 사용하던 분필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분필은 정제된 석고 가루를 굳힌 하얀색 안료이기도 하다. 이 분필은 매끈한 칠판에는 잘 써지지만 울퉁불퉁한 벽에는 잘 그려지지 않는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지워지고 만다. 이처럼 안료는 사용 장소와 방법에 따라 서로 다른 가공법이 필요하다.

[그림2. 블롬보스 동굴의 안료 가공 세트(S-조개류, B-뼈류, L-석기)]

[그림2. 블롬보스 동굴의 안료 가공 세트(S-조개류, B-뼈류, L-석기)]

가장 단순한 단계부터 살펴보자. 먼저 안료를 뿌리는 경우라면 약간의 정제 과정만 거친 후 물과 섞으면 된다. 다음으로 어딘가에 칠하는 용도라면 안료가 끈끈한 성질을 갖고 잘 부착되도록 해야 한다. 칠하는 대상이 피부나 작은 장신구라면 물이나 침, 혈액에 개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동굴 벽화를 그리려면 좀 더 복잡한 가공 과정을 거쳐야 한다. 동굴의 거칠고 습한 벽면에 안료가 잘 붙어 있으려면 강력한 교착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블롬보스 동굴에서 발견된 안료 세트는 구석기 시대의 안료 가공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다.(그림 2) 손바닥만 한 크기의 전복 껍질 안에는 빨간색 안료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납작한 규암 자갈돌이 덮인 채로 발견되었다. 빨간 안료에는 잘게 부순 뼈 조각들이 있었다. 연구자들은 이것을 근거로 곱게 부순 안료 가루에 지방이 풍부한 동물의 골수를 교착제로 섞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동물의 지방은 등잔의 연료인 동시에, 안료의 교착제였던 셈이다.

한편 벽화가 발견된 동굴 내부에서는 안료 덩어리가 많이 발견된다. 이 또한 동굴 밖에서 미리 정제 과정을 거친 덩어리 형태의 안료들이 반입된 것이다.(그림 3) 즉, 평소 다양한 색의 안료 재료들을 꾸준히 채집해서 분쇄와 정제 과정을 거쳐서 안료 덩어리로 만들어 두었고, 필요할 때 그것을 빻고 교착제를 혼합해 사용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요즘에도 석채 가루를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사용 직전에 아교를 섞는 것과 비교하면, 원시적 방식과 현대의 방식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