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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그 시절. 내가 아침에 일어나는 이유, 그것은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갑작스레 빚더미에 올라앉은 우리 집의 구구절절한 상황을 잊을 수 있었고, 가장이 되었다는 무거운 부담감을 떨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온갖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비로소 당당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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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문을 참 잘도 쓰는 아이, 어린 시절 나는 그런 아이였다. 어른들은 걸핏하면 아주 작은 실수에도 ‘반성문을 쓰라’고 엄포를 놓았는데, 나는 그 ‘반성의 시간’을 ‘재미있는 글쓰기의 시간’으로 바꾸어버렸다. 어른들은 벌을 주었는데 나는 그 시간을 마음껏 즐긴 것이다. 이렇듯 글쓰기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마력이 있다. 시작할 때의 마음과 끝낼 때의 마음이 너무 달라서.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벌 받은 아이에서 저 혼자 신이 난 행복한 아이로. 구슬픈 마음에서 뭔가 은밀한 기쁨을 간직한 마음으로. 상처받은 아이에서 이제는 다 괜찮아진 건강한 아이로. 그렇게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분명히 변신했다. 반성문을 쓰다 보면 어느새 내 이야기에 도취되어 그것이 반성문인지도 잊고, 구구절절 파란만장한 나의 이야기를 묘사하느라 정신이 쏙 빠졌다. 처음엔 반성문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내 간절함에 흠뻑 취해 나만의 이야기를 뚝딱뚝딱 빚어내느라 여념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게 글쓰기는 나를 유쾌한 투명 인간으로 만들어준다. 글쓰기에 빠져 있을 때는, 나조차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마치 중력의 지배를 벗어난 샤갈의 그림 속 사랑에 빠진 연인들처럼. 삶의 무게를, 나라는 존재의 무게를, 타인의 시선에서 오는 부담감을 내려놓게 된다. 글쓰기는 기억력을 강화하고, 사소한 추억까지도 소중한 의미로 물들게 한다. 글쓰기는 인간을 ‘나’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를 향한 거대한 연결로 이끈다. 게다가 글쓰기는 종이와 펜만으로도, 그 어떤 경제적 부담도 주지 않고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한다. 이런 식으로 나는 ‘글쓰기가 몸에 좋은 101가지 이유’를 밤새도록 나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무엇보다도 타인의 글을 읽고, 나의 글을 쓰고, 그리고 글쓰기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다 보면, 어느새 내 좁은 문해력의 세계를 뛰어넘어 ‘온 세상과 연결되는 거대한 문해력의 네트워크’로 진입하게 된다. 나는 결코 외따로 떨어진 고립된 존재에 그칠 수 없음을, 글쓰기를 통해 배우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만으로 ‘복잡하고 거대한 이 세계의 그물망’의 한 그물코를 담당하는 나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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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글쓰기는 ‘절망의 늪에 빠진 나 자신’을 구해주었다. 나는 한때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렸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한 충격과 절망, 연이어 다가온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해 이제 내가 우리 집의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시간강사의 박봉과 턱없이 적은 원고료만으로 살아야 했던 그 시절, 나는 아버지의 빚까지 떠맡아 허덕이고 있었다. 그때부터 무려 11년간 나는 아버지의 빚을 갚아야 했고, 도저히 그 우울의 늪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내 능력은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일까, 평생 노력을 멈춘 적이 없는데 왜 내 삶은 이 모양일까’라는 질문이 나를 괴롭혔고, 간신히 지켜온 자존감은 추락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원고 청탁은 예전보다 더 많이 들어왔다. 그 수많은 원고 청탁이 없었더라면, 나는 글쓰기를 포기했을 것 같다. 때로는 매일 원고 마감을 해야 할 정도였는데, 글을 쓰는 동안만은 온전한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끝없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듯한 우리 집의 절망적인 상황으로부터 글쓰기가 나를 구원해준 것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그 시절. 내가 아침에 일어나는 이유, 그것은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갑작스레 빚더미에 올라앉은 우리 집의 구구절절한 상황을 잊을 수 있었고, 가장이 되었다는 무거운 부담감을 떨칠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온갖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비로소 당당한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토록 강인해졌을까. 내가 어떻게 이토록 멀쩡해졌을까. 나는 어떻게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진정한 나 자신을 향해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다 신기할 정도로, 글쓰기라는 강력한 의무감은 나를 온갖 세상의 폭풍우로부터 지켜주었다. 전에는 무척 버거웠던 말들, 즉 의무나 책임이라는 말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말은 ‘이 세상에 나의 자리가 있다’는 뜻이었다. 나의 자리가 있다는 것은 내 자존감을 지켜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마치 바깥에서는 천둥 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데 ‘나만의 보이지 않는 요새’가 생겨나 자꾸만 흔들리는 나를 지켜주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