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그 긴 이야기를 인간의 언어로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개는 자신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인간이 지금 위로의 눈빛을 원한다는 정도는, 둘이 진지한 시간을 오래 보냈다면 충분히 알아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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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Canis lupus familiaris 혹은 Canis familiaris. 회색늑대는 Canis lupus인데, 회색늑대와 개를 같은 종으로 보는 관점 혹은 별개의 종으로 보는 관점에 따라 학명이 다르게 쓰일 수 있다)는 다른 어떤 동물보다 인간과 가까운 종이다. 개가 느끼기에도 인간보다 가까운 종은 없을 것이다. 개는 개끼리, 사람은 사람끼리 부대껴야만 얻을 수 있는 희로애락이 존재하는 것처럼, 개와 인간이 상호작용하는 경험은 동종인 누군가가 대체할 수 없다. 나도 내 개와 함께 지낸 나의 이십 대와 삼십 대를 그 까만 개 없이 상상할 수 없다. 개 중에서 가장 가깝게 지낸 개였다. 우리가 서로에게 미친 영향은 너무 커서, 나보다 수명이 훨씬 짧았던 그 개의 흔적은 개가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습관이 되어 남아 있다. 인간이 동물과 친구가 되는 경험을 진하게 하기에 개는 가장 적당한 종이다.
개와 인간이 각자의 방식으로 하는 이야기는 서로에게 가 닿을 만큼만 가 닿는다. 그래도 충분하다. 서로의 소통 방식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만큼 친구가 된다. 언어가 중요한 인간은 ‘앉아’나 ‘잘했어’ 같은 간단한 신호를 보내기도 하지만,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억울한 일을 개에게 한참 떠들기도 한다. 그 긴 이야기를 인간의 언어로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개는 자신에게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인간이 지금 위로의 눈빛을 원한다는 정도는, 둘이 진지한 시간을 오래 보냈다면 충분히 알아챌 수 있다. 꼭 얼굴을 쳐다보지 않아도, 인간의 무릎에 턱을 괴거나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핥아주기만 해도 완벽한 위로가 된다.
그렇게 인간과 개가 개별적으로 맺은 관계들은 인간과 비인간동물 전체의 관계에도 영향을 준다. 인간 외의 동물과 우정을 쌓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어떤 개 한 마리와 사랑에 빠지면서 다른 동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런 일은 전체 인구의 사분의 일이 개를 기른다고 하는 2023년의 한국에서 매우 흔하고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이 통계에 나타나는 ‘개’는 ‘반려견’이라고 불리는 개다. 여름철 보양식으로 기르던 개는 통계에 포함되지 않는다. 개를 먹는 사람이 야만인 취급을 받는 사회가 되면서 대중은 이제 막 개체로 인식하기 시작한 동물들을 보호와 연민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군색한 구호가 나오는 것 같다. “개는 가축이 아니라 가족입니다.”, “모든 개는 반려동물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반려동물이 아니라 가족입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언어를 찾는 여정은 멀고도 험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어떤 마음인지는 너무 잘 알지만, 달라진 개의 지위를 설명할 적당한 언어를 찾지 못해 큰 말을 골라 쓰다가 의식까지 덩달아 과장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개는 대체 무엇이 되어야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