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de> 💡 "눈앞의 동물에게 이타적이고 싶은 인간의 마음은 이상할 정도로 강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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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부산의 봄, 엄마 손을 잡고 장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에 앉아서 고양이(Felis catus)를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빨간 ‘다라이’ 하나에 새끼 고양이만 네댓 마리가 들어 있었으니, 고양이를 정기적으로 생산해서 파는 할머니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있는 크기의 어린 고양이는 한 마리에 오백 원이었다. 여느 아이들처럼 나는 엄마에게 고양이를 기르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꼭 짐승을 싫어하는 엄마가 아니더라도 부담이 되는 제안이었을 테고, 그 제안에 고양이 돌봄을 공동으로 책임지겠다는 전제가 없다는 것도 잘 아셨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고양이 입양을 무겁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어린이를 잘 기르는 데에 고양이를 기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긴 실랑이 없이 오백 원을 주고 고양이를 사주었다.
요즘 표현으로 ‘노랑둥이’, ‘치즈냥이’라고 부르는, 누런 줄무늬와 새하얀 털이 조합된 털빛의 고양이를 골랐다. 어린 고양이는 아직 눈망울에 멜라닌이 부족해 푸른 눈이 도드라졌다. 진주 색은 아니었지만 진주처럼 둥글어서인지 진주라고 부르기로 했다. 고양이 전용 화장실 모래도, 고양이 전용 사료도 없던 시절이다. 세숫대야에다 동네 공터에서 퍼 온 모래를 넣고 사람이 먹고 남은 밥을 먹였다. 진주는 두루마리 휴지를 찢으며 노는 걸 좋아했고, 두툼한 솜이불 위에서 나와 낮잠을 잤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면서 일 년도 함께 살지 못하고 진주를 누군가에게 주었다고 하는데, 그에 관한 기억은 없다. 진주와 헤어질까 봐 걱정하며 울었던 기억은 있지만, 헤어져서 운 기억은 나지 않는다. 고양이를 중성화하는 사건이나 집 안에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길러야 한다는 관념이 낯선 시대였으니 아마 진주는 옮겨 간 집에서 어느 시점엔가 집을 나갔을 것이고, 집이나 병원이 아니라 어느 후미진 골목 길바닥에서 꽤 짧은 삶을 마쳤을 것이다. 지금의 여느 길고양이처럼.
길고양이가 발에 채이고 입양을 기다리는 고양이가 보호소에 줄을 서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품종묘가 아닌 고양이를 사고팔던 시대는 꽤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농림축산검역본부에서는 매년 한국 가정에서 기르는 개와 고양이의 수를 발표한다. 통계는 산출 방법이 이랬다저랬다 해서 무척 부정확하지만 꼭 통계를 인용하지 않아도 집 안에서 기르는 고양이가 꽤 늘어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스타그램처럼 개인이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거나 타인의 일상을 감상하는 미디어에서 고양이가 등장하는 일이 많아진 것도 고양이가 늘어난 결과 혹은 이유일 것이다. 서울 시내에서는 가방에 츄르(짜 먹이는 고양이 간식) 몇 개 혹은 고양이용 간식 캔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집 안에 고양이를 들이기 시작한 지 삼십여 년 만에 집 밖에서도 고양이를 기르게 되었다.